2008/05/10 (토) 10:33
어제인 5월 9일 오후 1시 30분경, 용인의 기흥구청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재미난 문구를 구경했다.
내 사무실 이전 차 간 건데, 그러자면 문화출판 담당 사무실을 찾아야 하는데, 로비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용인은 어딜 가나 미친 놈들처럼 고딕체로 <세계최고 선진용인>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런 입간판 그늘에서는 무식하기 이를 데없는 일들이 허다하다. 더구나 기흥구청 관내는 전봇대마다 밑동에 <세계최고 선진용인>이라고 적혀 있어 길을 가다보면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이 미친 구호를 봐야만 한다. 군 출신 유신 사무관이 시장이라고 하여 다들 어쩔 수없다고들 체념하는데, 내가 이런 무식한 구호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고 하도 열을 내니 용인 토박이들이 말하기를 지금 시장은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니 2년만 꾹 참고 있다가 그때 다 없애버리잔다. 누가 너무 웃기는 슬로건이라고 말해주어도 이 <세계최고> 시장은 귀를 막고 안듣는단다. 시장이 이런 감각이니 그 아랫사람들도 장단을 맞추려고 그러는지 구청 청사에도 <세계최고 선진용인>은 여기저기 붙어 있는데, 정말 꼭 필요한 안내 문구는 없었다.
안내하는 사람 자리는 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마당에서 작은 바자회 같은 게 열리고 있으니, 그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다가 보니 2층에 자치행정과라고 있는 게 보였다. 원래부터 공무원들 어법이라는 게 무지막지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혹 자치행정과가 아닐까 하고 2층으로 올라가보니 거기 자치행정과라는 큰 팻말 아래 여러 가지 업무가 적혀 있고, 그중에 문화체육이라는 게 보였다. 그제야 방을 찾아가 일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자세한 안내판을 2층만이 아니라 로비에도 세워놓으면 좋으련만 굳이 2층에만 놓는 것이다. 2층이니 다행이지 3층이나 4층이면 어쩌나.
이게 왜 그러냐하면 모든 것을 공무원들 시각에서 발상을 하기 때문이다. 저희들은 자치행정과라고 하면 거기서 무슨무슨 일을 하는 줄 다 아니까, 일단 2층까지는 알아서 오고 그 다음에나 방을 헷갈리지 말고 이리 오라, 이런 얘기다. 그런데 나같은 일반시민이 어떻게 자치행정과에 무슨무슨 업무가 있는지 안단 말인가. 난 9급 공무원 시험 교재조차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비교 한 번 해볼까. 마침 그저께인 8일 오후에 자동차 앞유리를 교환했는데, 저녁 때가 돼서 정비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와 혹시 세차를 했느냐고 묻는다. 하려다가 시간이 없어 못했다니 휴 하면서 하루 동안은 세차를 하지 말아달란다. 왜 그런가 하면 실리콘이 굳어야 되는데, 세차를 하면 그게 안굳어 유리가 잘 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백배사죄를 했다. 이게 민간 서비스라는 거다.
어쨌거나 2층에서는 담당 공무원이 빈 의자에 앉아 기다리시면 곧 해드린다고 싹싹하게 굴어 기분이 풀어졌는데, 그 다음 과정에서 틀어졌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친철하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한데, 뭘 친절해야 진짜 친절한 건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문제다. 대면하고 나서 친절한 것도 중요하지만, 대면하기까지도 친절해야 하는 것이다. 하여튼 그 사무실에서는 공무원들이 죄다 열심히 일하고, 전화받고 하는 걸 보고 동사무소는 맨날 노는 것같아 언짢은데 그래도 구청이라고 일이 있기는 있구나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담당자 일이 끝나 2번 창구로 가라길래 갔는데, <2번 유기문서, G4C, 사이버민원>이라고 돼 있었다. 난 내 사무실 주소이전하러 간 건데, 암만 봐도 모르겠어서 다른 창구만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내 업무에 해당되는 곳이 없었다. 담당공무원이 거짓말했거나 내가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건 아니라고 확신하여 창구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여기 내는 거 맞느냐, 그랬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넙죽 서류를 받아 뒤적거렸다. 하도 우스워서 "대체 유기문서는 뭐고 G4C는 뭐냐"고 물었다. G4C는 뭐라고 설명을 들었는데 그새 기억이 안나고, 다만 유기문서는 문서를 내버리거나 쓰레기 문서라는 뜻이 아니고, 기한이 있는 문서라는 뜻이다. 설명을 듣고나니 화가 벌컥 났다. 이 세상에 모든 문서는 다 유기문서지 무기문서가 있나, 그럼 여기서 구청 일 다 하겠다 싶었다. 등본 하나도 유효기간이 있고, 건축 관련 서류같은 것도 다 기한이 있는 거고, 하다못해 대통령도 임기가 있어 유기한 건데 굳이 왜 이렇게 적었으며, 대체 유기문서라고 작명한 놈 머릿속 구조가 의심스러워졌다.
보나마나 행정자치부(이름 바뀌었다니 지금은 뭔지 모르겠다만)에 한 꼴통이 있어 이런 식으로 작명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둘 보면서 화만 낼 일이 아니고, 공공장소나 공공의 업무에 쓰이는 큰 용어 같은 건 반드시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확정하도록 해야겠다. 국민 생활에 관련된 이런 용어 작명권을 공무원들에게만 맡기면 우리 언어가 한없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싶다. 어떻게든 개선책을 마련해야겠다. 우리 기흥구청만의 문제도 아니고, 용인시의 문제만이 아니다.
원래 내가 한 살만 더 어려도 유기문서라고 쓰고, G4C라고 하여 민원인들에게 내보이도록 한 놈을 끝까지 추적하여 이런 데에 실명을 밝히는데, 이젠 지쳐서 못하겠다. 이런 일 누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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