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토정 이지함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되었다.
내가 이 생애에서 그 분을 만나게 된 과정은 <나와 토정 이지함의 400년 인연>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토정 선생은 내 선대조들과 친구였으며, 그는 오늘도 우리 집안이 잘 모시고 있는 선영과 종택을 자리잡아준 분이다.
나는 우연히 그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되어 어린 나이인 32세에 <소설 토정비결>을 집필하게 되고, 이 책이 그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350만 부가 팔리면서 나는 아직도 <소설 토정비결> 작가라는 타이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토정은 내게 많은 저작권료를 벌 수 있게 해준 데다가, 진실로 내가 감사하는 것은 그분의 작은 귀띔으로 <바이오코드>를 발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생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만들고 싶은 <바이오코드>를 오직 토정이 주신 영감에 의해 오랜 연구를 마칠 수 있었다. 따라서 바이오코드는 토정 이지함과 나의 합작 연구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가 자란 보령군 청라면이나, 그의 묘소는 모두 내 고향 근처에 있다. 청라는 한산이씨인 내 고교시절 친구가 살던 곳이고, 이산해의 묘소는 내 고향 청양군 운곡에서 아주 가까운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안곡마을이다.
고향에 오르내리면서 여러 번 이산해 묘소 표지판을 보았는데, 지난 여름 집사람과 함께 청양에 다녀오면서 마침내 그의 유택(유령의 집, 즉 무덤)을 자세히 돌아볼 수 있었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은 중국 사신으로 마침 산해관을 지나던 중 아들을 잉태하는 꿈을 꾸었다. 당시 서울 집에 있던 그의 부인도 같은 꿈을 꾸어 마침내 아이를 잉태했다.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되지만 하여튼 이 아이가 태어나고, 이지번은 산해관에서 신령스럽게 잉태한 아이라 하여 나중에 이 아들의 이름을 산해(山海)라고 지었다.
아마도 이지번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부인이 홀로 임신해 낳은 아이라 하여 꺼렸을 법한데, 마침 산해가 태어날 때 집에 남아 있던 토정 이지함이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설득하여 아들로 거두게 된 것같다.
이때부터 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지함은 이산해와 다른 조카 이산보 둘을 직접 가르쳤다.
이산해는 돌이 되면서 문자를 깨쳤는데 어찌나 똑똑하던지 5살 때 지은 시가 지금도 전해온다. 밥을 지을 때 상이 나오기 전에 지어보라며 숙부 이지함이 운을 주었는데 어린 산해가 뚝딱 지었다 한다.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는 법이니
모름지기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
토정 이지함은 이산해가 너무 똑똑하여 글 읽는 것을 말릴 정도였다.
6살부터 글씨를 너무나 잘 써서, 초서와 예서까지 척척 썼다. 사람들이 찾아와 이 어린 아이의 글씨를 받아갈 정도였다. 명종 임금도 이 소문을 듣고 영재를 직접 보고 싶다 하여 궁궐까지 가서 재주를 자랑한 적이 있다.
하지만 7살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실권자인 윤원형이 문정왕후와 함께 지난 날의 선비들을 음해해 몰살시키고, 일부는 귀양을 보내는데, 이산해 일가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크게 기운을 잃었다. 그래서 모두 고향인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로 낙향해버렸다.
이 무렵이 토정 이지함이 우리 할아버지 이복원, 이효원 등과 자주 왕래한 시기다. 보령군 청라에 살던 토정 이지함이 마침 살만한 터를 찾던 우리 할아버지들에게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를 추천했고, 이후 우리 일가는 그리 내려가 살기 시작했다.(우리 선조들은 전라남도 나주 -> 경기도 하남 -. 경기도 화성 봉담을 거쳐 충남 청양으로 내려갔다.) 청라와 장승리(이 지명은 효원 할아버지가 거제도 장승포에서 귀양살이를 한 기념으로 붙인 것이다. 장승개. 개는 포의 우리말.)는 걸어서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나도 중학교 때 잠깐 이곳 장승개에 살았다.
이지함은 보령에 내려온 뒤에도 조카 산해와 산보를 계속 가르쳤는데, 산해는 15세 이전에 이미 향시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산보도 나중에 판서까지 지내지만 일단 산해 이야기만 한다) 대과를 볼 수 있었는데도 이지함은 조카에게 계속 공부를 시켰다. 그러다가 이지함은 더이상 조카를 직접 가르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리산 산천재에서 선비들을 가르치고 있던 남명 조식에게 보냈다.
산천재에서 공부한 뒤에는 안동의 퇴계 이황이 연 도산서원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이때 양쪽에서 사귄 친구들이 나중 동인당을 이루는 주축이 된다.
서원 교육이 끝나가던 중 소문을 들은 정권 실세인 윤원형이 이산해를 사위로 삼으려 하자 그의 아버지 이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동생 이지함과 함께 일가가 충분 단양의 구담으로 숨어버렸다.
이후 이산해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초시를 거쳐 마침내 성균관에 입학했다. 여기서는 명종이 주관하는 제술에서 1등을 하고, 이어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23살 때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여 영의정에 이르고, 붕당이 생길 때 동인당에 참가하였다. 기축옥사 때 서인당의 정철이 산천재 동창들을 무참히 죽이자 이에 분개하여 동인당을 강력하게 조직, 대항하였다. 정철은 이산해를 정여립과 엮어 어떻게든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기축옥사 중에 동인당원인 유성룡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면서 두 사람 사이가 갈라져 이것이 나중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된다. 말하자면 산천재와 도산서원이 갈라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부터 유성룡과는 다른 길을 갔다. 이산해와 유성룡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면서 임진왜란 대책도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이후 국정이 어지러워진 단초가 되었다. 남명조식파를 대표하는 이산해와 퇴계이황파를 대표하는 유성룡 사이에 알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때 우리 집안은 이산해와 같은 동인 -> 북인-> 대북에 속해 함께 활동했다. 그래서 광해군이 즉위하는 데까지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는 선조 이균이 죽자 원상으로서 정무를 주관하고, 마침내 옥새를 광해군에게 전해주는 막중한 역할을 했다.
이후 영창대군이 사사되고, 인목대비 폐비 사건이 일어나면서 내 선조로서 당시 대사간을 맡고 있던 이효원이 이를 따지자 광해군은 화를 내면서 대사간을 거제도로 유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도 우리 집안과 같은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잡혀죽든지 귀양갈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은 인조반정을 일으키는데 앞장서고, 이때 이산해 가문은 이 반정에 합류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위기는 모면했다.
하지만 서인 정권이 출범하자 동인의 영수이던 이산해는 나쁜 인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인정권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지자 이러한 이산해에 대한 폄훼는 다시는 수정되지 않았다. 오늘날 임진왜란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이산해에 대한 비중이 약한 것은 바로 인조반정 후 수백년을 집권한 이 서인들 때문이기도 하다.(우리 집안이 서인 주도 인조반정에 가담한 결과 내 조상들은 역사적으로 폄훼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인당 당수인 송시열이 우리 집안을 칭송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임란 때 무능한 처신으로 동래성과 영남 일대를 빼앗긴 경상좌병사 이각 선조가 욕을 덜 먹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아계 이산해의 묘소를 둘러보고, 우리 두 집안의 오랜 관계를 되새겼다.
나는, 토정 이지함의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 역적으로 몰려 이후 한미하게 되었는데 <소설 토정비결>로 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과 명예를 되찾아 준 보람이 있다. 물론 토정 이지함이 내게 준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생각날 때마다 늘 감사드리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파란태양 > *파란태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내터널의 기적 (0) | 2016.09.07 |
---|---|
진시황에 대한 단상 (0) | 2016.09.06 |
권세? 그거 아침이슬이라 (0) | 2016.09.03 |
불량품을 보는 삼성과 청와대의 차이 (0) | 2016.09.03 |
한진해운이 안타깝다 (0) | 2016.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