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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바니 도란 도조 도쉰 다래

늙은 개 기르기, 그리고 한 비구의 글

늙은 개 기르기, 그리고 한 비구의 글


어쩌다 말티즈 도담이를 기르면서 나는 저절로 애견가가 되었다. 처음 앙증맞은 도담이를 한 손에 들고 가슴이 저리도록 기뻐할 때 나는 그 모습이 영원히 그대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도조도, 도란이도, 도리도, 도롱이도 모두가 다 그럴 줄만 알았다. 그러나 사람이나 개나 세월에 부대끼다보면 늙는 법이다. 또 사람이 늙으면 그러하듯이 개도 늙으면 병이 많아진다. 당연히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써야 하고 치료비도 많이 들어간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 재롱떠는 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면서 저희집 개들도 다 그럴 줄 알고 다투어 사들였다가 재주도 없고 자꾸 늙어가며 병이 생기니까 마구 버려 요 몇년간 심각한 유기견 사태를 맞았다. 동물병원마다 수용이 불가능할만큼 많은 개들이 버려졌다. 수많은 개들이 그렇게 해서 안락사당해 세상을 떠나갔다.


그러기로 말하면 우리집 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담이는 속아서 입양하는 바람에 말티즈가 아니라 거의 대형견 비슷하게 자라나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녀석이 머리가 좋아 스스로 사랑을 이끌어냈으니 망정이지 외모는 꽝이었다. 어린 시절 그 예쁘기만 하던 도란이도 늙어서는 검버섯이 피고, 그 청아하던 목소리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늘 귓병이 생겨 어느 겨울인가는 그 눈발을 헤치며 거의 석달간 매일 병원에 다녔고, 유선종양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끝내 여러 가지 복잡한 암으로 고생했고,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떠나갔다.


빛나는 회색털을 자랑하던 우리집 최고령견 도조는 지금 내 발밑에 누워 있는데, 수액을 맞는 중이다. 늙은 뒤로 병원에 맡기면 어찌나 노여워하는지 혈관주사만 끼워갖고 집에 와서 천천히 수액을 맞아야 한다. 수액을 맞다보면 개들도 사람처럼 소변을 자주 보게 되어 수액 봉지를 높이 쳐들고 화장실을 함께 들락거린다.

우리 도조는 코에 종양이 생겨 월요일에 2차진료기관인 분당 해마루병원에 가서 양성인지 악성인지 정밀진단을 받을 예정이다. 피부는 온통 썩은 검버섯 색깔이고, 눈에는 백내장이 끼어 마치 안개가 낀 듯 희뿌옇고, 귀는 잘 안들리는지 제 욕을 해도 통 모른다. 코에는 콧물을 달고 산다. 뒷다리는 교통사고 후 잘 모아지지 않고 자꾸만 벌어져 신발을 신지 않고는 방에서 돌아다니지 못한다. 신발을 신은 채 대소변을 가리니 이 신발을 자주 갈아신겨야 한다. 두 켤레를 번갈아 빨아대는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게을러 좀 늦게 씻어 널면 제때 마르지 않아 신발을 벗겨놓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체조선수들처럼 다리가 180도로 찢어져 일어서질 못한다. 일어나고 싶은 게 마음뿐이니 그냥 끙끙거리기만 한다. 내 소원이 하늘에 통한다면 우리 도조가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도반이는 또 어떠했던가. 정신치료가 필요했던 도반이는 우리 가족들을 하도 물어서 딱지질 날이 없었고, 10년이나 보살펴주는 주인인 나도 물고, 걸핏하면 으르렁거렸다. 그러다보니 늘 마취를 해야만 미용이 가능했다. 열네살 늙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는데, 나는 도반이가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다 풀고 가지 못한 듯하여 안타까웠다.


이런 내게 너무 집착이 강하다고 눈치를 주는 친구가 여럿 있다. 갖다 버리든지 남에게 줘버리라고 한다. 하지만 이 늙고 병든 개들을 누가 받아줄 것이며, 나만큼 돌봐줄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유기견으로 버린들 재입양이 안될 게 분명한 데, 그러면 한 달 뒤에는 안락사당하게 된다. 차라리 내 손으로 안락사를 시킬지언정 나는 내 문제를 그런 식으로 외면하지 못한다.


난 항상 정면으로 문제를 풀도록 노력한다. 열여섯 살 도신이가 심장판막증 말기 증세가 심해져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 난 수의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안락사시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도신이를 안은 채 안락사 과정을 진행했고, 도신이 눈을 바라보며 “지금 너를 하늘에 보내마, 나중에 만나자” 이렇게 속삭이면서 내 볼을 도신이의 머리에 부벼주었다. 수면제를 주사한 뒤 심장이 멎는 약을 주사할 거라고도 알려주었다. 고통은 없을 테니 편안히 가라고도 말해주었다. 도신이는 내 품에서 그렇게 갔다.

도란이, 도롱이, 도담이, 도리가 그렇게 갔다. 이 아이들이 갈 때는 무섭지 말라고 내가 꼭 안아주었다.

우리 아버지, 숙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아버지한테는 죽기 전까지는 의식을 놓지 말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안돼요, 아버지. 아무리 힘들어도 기절하지 말고 끝까지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가 이 세상에 먼저 오셔서 절 기다리신 것처럼, 하늘에 가셔서도 절 기다리세요.” 물론 그러지 못하셨을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산소호흡기를 오래도록 달아드려 그럴 여유를 갖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큰집당숙이 돌아가실 때에도 하필 글 쓰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뭘 더 알까 싶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길래 아는대로 다 말씀드려 당숙이 담담하게 죽음을 맞으시도록 도와드렸다.


오늘 집에 손님이 와서 또 환자 투성이인 우리집 개들 얘기를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갖다 버리면 간단한 것을 가지고 왜 이 궁상이냔다. 그래서 나는 법정 비구의 <무소유>란 글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나도 그런 가식을 지녔으면 좋겠지만 난 그러지 못한다. 기르던 난을, 난(蘭) 애호가들도 다 그러지 못하련만 외국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하이포넥스까지 사다 주며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난을, 심지어 ‘그애들’이라고까지 표현하던 생명들을 남에게 툭 던지듯이 주고나서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을 만끽하는 걸 보니, 과연 이 우주가 연기법계임을 믿는 불교 승려인가 싶다. 그 마음과 이 마음이 왜 그렇게 다른가. 언제 또 이 마음이 그 마음이 되려는지.

난 하반신 마비로 소변을 보지 못하는 개 바니 때문에 밖에 오래 나가 있지 못한다. 불편하다. 열여덟살된 도조는 시각과 청각을 잃어 주인이 없으면 큰일나는 줄 알아서 역시 데려가야 하고, 하나 남은 심장판막증 앓는 다래는 때맞춰 심장약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집에 둘 수가 없다. 이렇게 셋 다 자동차 뒷자리에 태워 가면서 때맞추어 바니 소변을 짜주고, 다래 약을 챙겨먹여야 한다. 이 녀석들을 돌보려면 몸이 매우 불편하다. 하지만 마음은 가볍다. 어쩌다 도조만 데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반이와 다래를 병원에 맡기면 돌아와서 녀석들을 찾는 순간까지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다. 그래서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편한 쪽을 선택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법정 비구의 글을 보니 마음은 불편하더라도 몸이 편한 쪽을 구하는 것같다. 기르던 개를 내다버린 사람들이 다 그러리라. 


그 글을 한 편 읽은 뒤로 난 법정 비구의 글은 더 이상 읽지 않아서 그이가 나중에 무슨 글을 쓰는지 모른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누군가 타이핑한 원문이 튀어나온다. 다시 읽어보니 아직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화려한 리본처럼 간디의 명문을 앞뒤로 달아둔 건 더더욱 가관이요,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들을 버려야 좋은 글이 되련만 사족이 너무 길다. 마치 변명처럼.

법정은 감히 간디의 무소유를 끌어다 자신의 무소유로 삼아서는 안된다. 하물며 ‘똥 닦은 걸레’ 분소의로 옷을 지어입은 붓다며 그의 제자들 앞에서 그 비싼 가사를 입고, 좋은 다구로 차 우려마시면서 감히 무소유란 말을 해서는 안된다.

또한 무조건 버리는 건 무소유가 아니다. 그럼 눈도 빼 버리고, 이빨도 빼 버리지 그런 건 왜 달고 다니는가. 더구나 있던 걸 버리는 게 무소유라면 쓰레기와 공해를 버리는 것도 무소유인가.

난 그이가 생각하는 무소유가 겁난다. 필요하면 지니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게 무소유라니, 난초 화분인들 생명이 아니고 우주가 아니랴. 유기견 주인의 마음이나 유기분 주인의 마음이나 다른 게 없을 것같다.

성철 비구가 출가 초기에 가족들이 찾아오자 일부러 돌아앉은 채 참선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난 이런 무소유를 존경한다. 성철은 가족을 버린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린 것이다. 왕궁을 뛰쳐나와 숲으로 들어간 석가모니도 아버지인 왕과 어머니인 왕비, 그의 부인인 태자비를 버린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린 것이다. 자기는 버리지 않고 남을 버림으로써 자유를 얻는다면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있는 분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법정 비구의 <무소유>를 읽어보시라. 난 이런 위선이 정말 싫다. 그가 불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단지 글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거였다면 비구의 옷부터 벗어던지고, 반들반들한 머리에 그들이 무명초라고 부르는 머리카락도 길러보기 바란다. 그가 입고 있는, 비싸고, 잘 다려입은 잿빛 가사, 파랗게 깎은 머리도 일종의 프리미엄 아닌가.

-  난 특정 비구를 비난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더 바른 생각이 뭔지 생각해보기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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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 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 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따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이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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