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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바니 도란 도조 도쉰 다래

여기던가 저기던가

2008/05/11 (일) 15:21

 

5월 10일, 부처님 오신 날에 다른 곳을 가기로 해서 평소 다니던 절에 미리 가 연등 공양을 신청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아이들이 잠든 곳을 들러보기로 하여 길을 바꿨다. 오랜만에 간 옛 마을을 가로질러 뒷산으로 올라갔다.
도담이, 도롱이, 희동이, 도란이, 도신이, 도반이까지 모두 여섯이나 잠들고 있는 우리집 공동묘지가 된 산이다. 하지만 묘비도 없고 봉분도 없어 겉으로는 그저 우거진 숲이다.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 우리가 10년 넘게 즐겁게 뛰어놀던 뒷산이라는 의미만, 옛 추억만 남아 있는 곳이다. 우리 기윤이를 업고 강아지들을 우르르 데리고 산책하던 곳, 머리 식힐 때 훌쩍 올라오면 강아지들도 신나게 달려오고 나는 체조를 하던 곳이다.
 
먼저 도란이와 도신이가 묻힌 곳으로 갔는데,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대략 위치는 넓게 알 수 있을 것같은데 아이들이 잠자는 곳이 딱 찍어 어느 지점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에 왔을 때 꽃을 놓고가서 꽃을 싼 비닐로 위치를 잡았었는데, 그새 낙엽이 많이 쌓여 어딘지 모르겠다. 여기던가 저기던가 둘러보면서 하늘에서 잘들 지내고 있지, 이렇게 묻기만 했다. 준비한 꽃이 없어 말로만 속삭이다가 물러나왔다.
다른 아이들이 묻힌 곳도 마찬가지다. 도담이, 희동이 묻힌 자리는 숫제 감을 잡을 수도 없다. 다행히 도롱이와 도반이 묻힌 곳은 정확히 기억이 나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었다.
 
산언덕에서 우리 가족이 단란하게 살던 집을 내려다보았다. 통나무 외벽이며 지붕이 그대로다. 내가 둘러친 담장도 옛날 그대로다. 그때처럼 기윤아 하고 부르면 유치원다니는 우리 딸이 달려나오고, 그보다 더 빠르게 달리기 잘하는 도롱이며 희동이가 전속력으로 언덕을 달려 올라올 것만 같다. 그뒤로 키작은 아이들 중 가장 용맹스런 도신이가 올 것이고, 다래가 땅을 치며 달려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소 느린 도란이와 도리가 도반이를 제치며 달려올 것이다. 우리 도조는 본디 점잖아서 내가 불러도 그곳까지 뛰어오지는 않으니 마당에서 컹컹 짖어대며 안절부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게 뛰어들어 서로 안아달라고 뛰어오를 녀석들, 하나하나 머리를 만져주고 키작은 도란이와 도신이는 번쩍 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10년 전 기억이라니. 그러길래 유치원 다니던 우리 딸이 고등학생이 된 거 아닌가. 
 
세월이란 날아가는 화살같다. 사는 이 순간 순간이 소중할 뿐 목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작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 시작이고, 지금이 마지막이다. 아이들이 건강할 때는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 것같더니 세월이 지나니 다 늙고 병들어 앞다투어 내 곁을 떠나갔다. 아직 살아남은 그때 그 시절의 우리 도조는 올해 열아홉 살이 되어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들리고, 이는 다 빠져 송곳니 하나만 남았다. 오직 냄새로 주인을 찾고, 사료를 찾고, 저 잘 침대를 찾아오를 뿐이다. 집에 두고 외출했다 돌아와 식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잘 모르다가 내가 먼저 저를 찾아 안아주고, 내 냄새를 맡도록 얼굴을 갖다대줘야 그제야 반갑다고 울부짖는다.
 
시간이 무상하게 흐르니, 아이들을 자주 보러 갈 수가 없다. 대신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엄나무 한 포기를 손으로 캤다. 잘 살라고 그곳 붉은 황토를 한 줌 떠와 엄나무 뿌리에 발라 마당에 심기로 했다. 엄나무 따라 너희 외로운 영혼들아, 집으로 따라오너라, 이렇게 속으로 말했다.(엄나무는 오자마자 물에 반죽한 황토를 뿌리에 발라 심었더니 싱싱하게 잘 살아 있다.)
 
늦었지만 극락 내원에 피어 있다는 노랗고 하얀 모란 꽃(어제 절에서 찍은)을 아이들 머리맡에 놓는다.


5.14 내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오늘 아침 꿈에 아이들이 찾아왔다.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 온 사방이 봄인데, 웬일인지 내가 오르는 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한겨울마냥.
그냥 거기 눈밭이 있는 산언덕에 우리집 개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오르는데, 아이들이 얼어죽었으면 어쩌나 하면서 다가갔다.
중턱에 오르니, 우리 아이들이 사는 집이 보였다. 결코 내 솜씨로 짓지 않은 낯선 집,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문은 열려 있고, 집밖에 도롱이와 희동이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집으로 다가가니 안에 있던 도란이와 도신이가 나를 알아보고 달려나왔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리 오너라.
도란이가 뛰어오고 도신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왔다. 그러고는 암전.
왜 네 아이만 얼굴을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간 지 얼마 안되는 도리, 다래는 나오지 않고, 무는 개 도반이가 보이지 않았다. 도담이야 간 지 너무 오래되어 그렇다치더라도 도반이가 안온 건 섭섭하다.
그립고 그리운 우리 아이들, 꿈으로나마 얼굴을 보니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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