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5/26 (토) 23:57
“와서 보라(ehi-passika)!”
2500년 전, 깨달음을 이룬 붓다는 와서 믿으라거나 나만 믿으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붓다가 와서 보라는 것은 그가 깨우친 담마(Dhamma, 진리)였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라’고 외치는 책이 한 권 있다. 임현담의 “히말라야 있거나 혹은 없거나”다.
히말라야는 ‘눈(雪)의 집’이란 뜻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히말라야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까마득히 솟아오른 봉우리에 덮인 하얀 눈이 떠오른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히말라야를 상상할 것이다. 누군가는 히말라야가 동쪽 겨드랑이에 품고 있다는 ‘달과 별’ 샹그릴라를 떠올릴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마나슬루나 안나푸르나 같은 봉우리를 타고 올라가 깃발을 꽂고 싶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히말라야가 품어 기르는 티벳 라마들의 영적 세계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수많은 히말라야의 얼굴을 담고 있는 저자의 만행기(萬行記)다.
히말라야에 관한 책은 매우 많지만 우린 누군가의 눈에 갇힌 특정한 히말라야를 읽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틀을 저자 스스로 무수히 깨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마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원리를 히말라야에 찾으려는 듯이 어떤 때는 히말라야를 잘게 나눠 보이고, 어떤 때는 이를 다시 합쳐 전체로 보여주려 애쓴다.
히말라야 기슭을 밟든, 절벽을 타고오르든, 혹은 히말라야가 품고 있는 동식물이며 인간을 만나든 꼭 알아야 할 상식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책은 무엇보다 히말라야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저자는 끝없는 화두를 수시로 뿌려대며 독자들을 이끌거나 혼란시킨다. 이렇게 페이지마다 깔린 화두가 어떤 독자에게는 마름쇠가 되어 읽어나가기 힘든 장애물이 될지도 모르지만, 히말라야를 깊이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는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시킴 히말라야, 네팔 히말라야, 가르왈 히말라야, 아샘 히말라야, 부탄 히말라야, 펀잡 히말라야, 티베트 히말라야 등이 있는데 이 모든 히말라야를 다 보기란 극히 힘든 일이고, 혹 전문 여행가로서 사방팔방에서 보고 밟고 만졌다 한들 그로써 히말라야 여행을 ‘마쳤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히말라야가 물질적인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라는 증거를 무수히 보여준다. 그가 히말라야를 향해 절을 하거나 히말라야를 적시는 별빛과 대화를 나누는 대목에서 히말라야는 어쩌면 저자가 그의 영혼을 맡기고 싶은 성소(聖所)가 아닌가 하는 경외심도 생긴다. 저자에게 히말라야는 곧 종교요 사상이요 만트라요 예술인 듯하다. 생각이 다르면 대상도 달라진다는 사실이 놀랍다.
저자의 말대로 참 ‘너저분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런 게 히말라야라는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거운 등짐을 진 늙은 야크가 방금 싸놓은 똥까지 히말라야이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눈을 감으면 도리어 히말라야가 더 또렷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제목이 ‘있거나 혹은 없거나’인가 보다.
-2005년 동아일보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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