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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가던 길 멈추고 2018

사랑은 너무 작고 너무 짧아라

살다 보면, 아주 드물지만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나는 수가 있다.

부드러운 그 영혼의 갈기를 한 올 한 올 만지면서 잠시 잠깐 미분(微分)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해 아늑한 평화를 느낀다. 그것이 잠시 뒤에 사라지는 허상임을 알지라도, 이내 슬픔이 쳐들어와 홍수처럼 흐르고 무거운 아픔이 신경을 찔러댈지라도, 나는 그것을 느낀다.

사랑스런 그를 구성하는 60조 개 세포의 원자를 다 끌어모아, 그 중에서도 실체가 있는 핵을 가려모으면 0.02mm의 구()가 된다. 사실상 그의 실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그는 허구다.

마치 한 원자의 크기가 지구만하다면 막상 그 핵은 축구공 크기밖에 안된다.

그런 원자를 이루는 미립자조차 10-23만 존재하고 금세 사라진다.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슬픔도 존재도 찰나요, 허공의 먼지라는 뜻이다.



- 붓다의 진신사리. 80 평생의 그 한 몸이 사리 몇 알로 남아 있다.

하물며 사리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0.2mm의 매우 작은 형상으로서, 10-23초라는 짧은 시간 존재하는 그의 숨결을 느끼고 까만 머리칼을 훑어본다. 공()을 바라보고, 공을 만진다. 그 찰나의 순간 그는 사랑스럽다, 부드럽다, 곱다, 이런 언어로 포장해보지만 그래도 실체는 0.2mm 밖으로, 10-23 밖으로 사라진다.


딸이 태어나 자라는 걸 지켜보면서 마치 미립자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때그때 얼굴이 달라지는 걸 보아왔다. 지금 내 딸은 그 딸이 아니고, 내일은 오늘의 그 딸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딸 사진을 걸어놓고 그때를 추억하지만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내 책상 앞에는 사라져버린 미립자의 흔적처럼 허망한 딸 사진이 늘어서 있다.


- 1993년에 존재하던 이 아이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지금 이 아이라고 주장하는 '전혀 다른 개체'가 있어서 나를 아빠라고 부를 뿐이다.


사랑하는 나의 영혼들이여, 그대들이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일지라도, 나는 사랑한다. 나의 이 믿음이 바람처럼 연기처럼 사라지기 전에 나의 히포캄푸스(해마)에 그 영혼들의 이름을 새겨넣는다. 그러면 일단은 나의 가상 현실이 될 테니깐. 죽는 날까지는.


- 아나파나. 그렇다고 시간이 멈추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