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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가던 길 멈추고 2018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이상해지거든

내 딸 보아라.

아빠 3살 때였다. 네째 숙부(1941년생이니 아빠보다 17살이 많으시다. 그러니 17살 청년이었겠지)가 나를 등에 태우고 안방을 기어다니다가 그만 나를 떨어뜨렸단다.

하필 화로에 떨어졌는데, 놀란 숙부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며 "울지 마, 울지 마, 우리 애기!" 이러기만 했단다. 그렇게 달래는데도 내가 악을 쓰며 울더란다.

이상해서 나를 내려 놓고 보니 내 배(배꼽에서 위로 3Cm,오른쪽으로 3Cm)에 빨간 숯불이 붙어 있더란다. 살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겠지. 지금도 아빠 배에 가로 2Cm, 세로 8mm 정도의 흉터가 있다.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별명이 울새가 되었다. 아마도 심장을 크게 상한 모양이다.

겁이 많아지고, 손을 잘 떨었다. 실제로 손과 어깨가 떨렸다. 다른 데는 안떨리는데 손과 팔, 어깨가 떨려 지금까지 수전증이 약간 남아 있다. 어려서는 아주 심했는데 지금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피곤하면 다른 사람 눈에 띈다.


초등학교까지 2Km가 약간 넘는데 6년간 걸어다녔다. 중학교는 10Km쯤 되는데 또 걸어다녔다. 

방학이면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거나 칡줄기를 끊어오느라 운동을 많이 했다.

이후 자주 겁에 질리던 증상은 사라졌는데 손만은 여전히 떨린다.


남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는 증상이 있었다.

심장이 약해서 그랬던 것같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이런 증세는 줄어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아침마다 공산성(백제 시절 산성)에 올라가 운동했다. 그래서 100m 달리기를 잘 하고, 5Km 달리기는 매우 잘했다. 야구도 제법 했다.

대학 다니는 동안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자주 시위에 나가면서 심장이 더 튼튼해진 것같다. 대학 시절, 문무대라는 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힘든 줄 몰랐다.


소설가로 살면서 수천 명, 수백 명 앞에서 강연하거나 연설하는 일이 있어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가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마도 사생관이 뚜렷해지면서 더 그렇게 된 것같다.


하지만 아직도 수전증은 남아 있다. 피곤하면 반드시 증상이 나타난다.

오늘, 어지럼증이 온 걸 두고 깊이 생각하다 보니 3살 때 일이 생각났단다.

그간 심장 증세는 느낀 적이 없는데, 무술생인 아빠가 이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무술년이 되니 몸이 옛날 일을 기억하는 건지 어지럼증이 살짝 왔다 갔다.

아빠는 현재 거의 모든 신체 기능이 매우 건강하다. 심장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 요즘 과로해서 잠깐 나타난 증상같다.


그렇더라도 심장 관리는 잘 하마. 

아빠는 중학교 1학년 때 뇌를 조금 다쳤다. 물리적인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먼 길을 걸어서 다니느라 지쳐서 그랬던 것같다. 그때 측두엽의 청각과 후두엽의 시각 신경세포들이 겹치는, 말하자면 자기들끼리는 그러면 안되는데, 시냅스가 갑자기 연결돼버리고, 그 과정에서 귀신을 여러 번 보았다. 환청, 환시는 자주 보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까지 저녁을 굶고, 점심까지 굶는 일이 많아서 해마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고, 뇌량 성장이 더뎠던 듯하다.

하지만 아빠가 자주 쓰러지고 귀신을 보자 읍내 큰당숙 댁으로 가서 중학교에 다녔다. 특히 교사이던 육촌형에게 의지해 중학교를 다니면서 잘 먹고, 잘 운동하여 그런 증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래도 가끔 두뇌 영양 상태가 나쁘면 그런 증상이 도진다. 무서운 공황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학 때, 자취하면서 잘 먹지 못하자 바로 그런 현상이 나타났었단다.


지금 아빠는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사실은 영양제와 음식으로 조절하고 있는 임시방편 능력이란다. 

기본적으로 아빠는 어린 시절을 너무 가난하게 보내서 해마가 그리 우량하지 못하다. 아빠가 좋아하는 수학, 물리, 화학을 공식과 분자식 등을 못외워 제대로 즐기지 못했단다. 해마의 장기기능이 다른 사람보다 뒤떨어졌다. 지금은 해마 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다른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말하는 소리까지 듣고는 있지만, 영양제 끊으면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나파나 사티를 열심히 하고, 두뇌영양제를 챙겨 먹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만 가능하단다. 그래서 아빠는 네 발 달린 동물의 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는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금세 장애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빠가 만약 어느 날 아프다는 말이 들린다면 아마도 심장 + 해마 부분일 것이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관심이 많은 이유도 내 해마를 유지관리 못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빠는 두뉘를 다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염색도 안하고 샴푸도 안쓴다. 햇빛을 쬐면서 의도적으로 자외선 B를 받는다. 그래서 아빠 얼굴이 동안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니? 이처럼 매우 조심하고는 있지만 인체는 너무나 미묘하고 예민한 것이라서 아빠가 모르는 기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아빠가 혹시라도 갑자기 의식을 잃거든 심장과 해마를 잘 살펴다오.


만일 심장을 다쳤다면 의사들이 알아서 치료를 해줄 것이다. 심장 치료 기술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그러니 의사를 믿고 의지해라. 아, 한의원은 절대 데려가지 말아다오.

만일 해마를 다쳤다면 이건 매우 심각하니, 내 말 잘 들었다가 그대로 따라하기 바란다.


아빠에게 햇빛을 자주 쬐어다오. 비타민 D주사를 두 달에 한번씩 맞게 해라. 영양제로 먹는 건 아마 안될 거다. 비타민 B 콤플렉스와 생들기름 캡슐제를 먹여 다오.

아빠를 면회할 때는 아빠가 누군지 자주 설명해다오. 아빠는 아마 소설가였다는 사실도 잊을지 모르고, 바이오코드를 만들었다는 것도 모를 거다. 그러니 차근차근 알려다오. 아빠가 지은 책을 갖다주면 기억을 회복는데 더 도움이 되겠지.

너를 보고 누구냐고 묻거든 당황하지 말고, 저는 아빠 딸입니다, 이렇게 똑똑히 말해라. 그리고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자랐는지 네가 아는대로 말해다오. 어쩌면 살아 있는 해마 신경세포 중 어떤 놈이라도 너를 기억할지 모르니까.


특히 잊지 말 것은, 해마 신경세포는 조금씩 새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전 것이 다 죽었다 해도 새 신경세포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면회오는 어떤 여자가 내 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정도는 기억할 수 있고, 다음 날 네가 올 때면 비록 감동적이지는 않겠지만 "내 딸 왔구나." 이렇게 머리로 말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너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김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외할머니는 사위인 아빠를 보고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단다. 자기 딸을 보고도 목사님 사모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말했단다. 네 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중학생이 된 동규와 명원이를 젖먹이쯤으로 잘못 기억했단다. 선거 때는 이미 총리하다 사표 내고 재판받는 이완구 찍으러 가야한다며 소리치기도 하셨다. 사람이 늙으면 뜻하지 않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아빠가 혹시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게 된다면 큰 공책 하나를 줘라. 거기다 기억을 계속 적으라고 해라.

맨앞장에는 <이 책을 아침마다 읽고나서 하루를 시작하세요! 아빠 딸 이기윤> 이렇게 적어 놔라. 그리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적으라고 아빠를 가르쳐라. 그러면 아마 아빠가 요양원이나 병원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아빤 컴퓨터를 잘 하니까 아이패드 같은 걸 하나 갖다 줘도 잘 쓸 것이다. 거기에 아빠 사진과 네 사진, 가족 사진을 많이 담아 일일이 누구인지 파일명을 적어 다오. 그러면 아마 다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네 어린 시절 사진, 지애 어린 시절 사진, 명원이와 동규 어린 시절 사진이라면 아빠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옛 기억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같구나. 기억은 가까운 것부터 사라지니까 옛 기억이라면 아마도 내가 의지할 수 있을 것같구나. 너는 못알아보더라도 아기 시절의 너는 알아볼 테니까. 그런 일이 닥치면, 작은아버지가 면회오더라도 아빠가 못알아보겠지만, 작은아버지의 어린 시절 사진, 젊은 시절 사진이라면 "이 사람은 내 동생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단지 기억을 못할 뿐 아빠의 영혼이 사라진 건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

만약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이 나타난다면, 아마도 아빠는 성격이 변할 것이다. 지금처럼 계산하고 따지고 분석하는 과정 없이 욱하고 화를 내거나 어쩌면 다정다감해질지 모른다. 네가 알던 아빠는 사라지고 한 마리 포유류 짐승처럼 너에게 꼬리를 치거나 이빨을 드러낼지 모른다. 해마를 다치면 맨먼저 좌뇌 기능이 끊어지고, 우뇌만 남는다. 우뇌는 아마 해마와 생사를 같이 할 것이다. 사람에게 먼저 생긴 것이 우뇌이고, 좌뇌는 나중에 생겼기 때문이다. 할머니처럼 소뇌의 혈관이 막히는 소뇌경색이라면 손발을 제대로 못쓸 수도 있다. 그런데 아빠는 소뇌는 건강한 듯한데,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아빠는 어차피 아나파나 사티를 하면서 모든 기억을 지워나가는 중이다.

쓸데없는 건 다 털어버리고 두뇌를 가볍게 하는 수행을 하는 중이다.

아빠는 5년 내에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정리하여 재단에서 연구하도록 할 것이다. 아빠의 사전 저작물은 네게 상속하지 않고 재단에 넘긴다. 그런 줄 알아라.

* 사전 부분에 대해 딸이 항의하길래 더 적어둔다. 내가 만든 사전의 저작권은 딸이 갖되 사전 편찬 작업과 증보판을 만들고 출간하고 관리하는 일은 재단이 맡는 것으로 정정한다. 다만 재단 연구원들이 기획하여 만든 사전의 저작권은 재단과 그 연구원이 가지며, 내 사전의 저작권료는 재단 및 연구원 50%, 내 딸 50% 나누는 것으로 한다. 알겠느뇨, 딸?

70세가 넘으면 소설가의 인생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바이오코드만 할 것이다. 

80세가 되면 바이오코드마저 버릴 것이다. 소설 저작권은 네가 갖되, 바이오코드는 아빠 제자 중에서 네가 믿을만한 분에게 맡겨라.


그때부터는 아빠 스스로 기억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 대뇌 정보도 가능하면 털어버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 올 때처럼 해마도 대뇌도 가볍게 비운 채 시간을 즐기고 공간을 거닐 것이다.


딸아, 그러자면 어떡해야지?

그래, 네가 아프면 안된다. 아빠가 반야의 세상으로 갈 때까지 너는 아프면 안된다.

아빠가 가르쳐준 대로 약 잘 먹고, 두뇌영양제 잘 먹고, 늘 운동하기 바란다. 살찌지 않도록 해라.

아빠는 이 세상으로 더 오지 않는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러니 내가 잘 갈 수 있도록,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아빠의 유일한 딸로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기 바란다.


이 글의 존재를 늘 잊지 말기 바란다.

아빠가 아니어도, 네 엄마든 네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든, 너를 엄마보다 더 사랑해준 숙모들이든, 이 글은 그 사람의 마지막을 잘 보살펴 줄 수 있는 지침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빠가 목숨바쳐 사랑한 사람은 아빠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너란다.

잊지 마라. 아빠가 너에게 쏟은 사랑, 너는 네 자식에게 쏟아라. 그게 효도다.


더 할 말 있으면 나중에 덧붙이마. 오늘은 여기까지다.

덧불일 때마다 날짜를 적으마.


2018년 3월 3일


- 아빠는 이 모습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싶단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너는 아빠를 지지해 다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미래를 위해 몇 자 더 적어둔다. 물론 마음 바뀌면 고치마. 그러니 놀라지 마라.

장난 삼아 적는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마라. 장기기증서 작성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빠가 혹시 죽으면, 쓸만한 장기가 있다면 모두 적출하여 기증해라. 

다만 실험용으로는 제공하지 마라. 어떤 죽음이든 해부하지 말고 그냥 태워라.

아빠는 무덤을 원하지 않는다. 비석 세우지 마라. 

반드시 불에 태워 그 가루는 할머니할아버지 묘소, 네 고향이자 도담이 도란이가 묻혀 있는 용수마을과 네가 아픈 시절을 보내고 리키 바니 등 다른 아이들이 묻혀 있는 묵리 앞산에 나누어 뿌려다오.

제사는 절대로 지내지 마라. 아빠를 도로 세상으로 부르는 짓은 절대 하지 마라.

아빠에게 기도하지 말고, 그리워하지 마라.

아빠는 이 우주가 생기기 전의 그 한 점으로 돌아간다.

너 외에 모든 사람은 헛것이다. 너를 깨우치기 위해 잠시 등장하는 캐릭터일 뿐이다.

희망, 행복 따위를 꿈꾸며 시간 낭비하지 마라. 그런 건 없다. 시간 도둑일 뿐이다.

싸움을 포기하지 마라. 전쟁은 인류를 길들이고, 싸움은 사람을 길들인다. 길들인다는 건 사람이 <절대인간>인 신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싸움을 피하며 뒤에 숨어 말만 늘어놓는 자는 비겁한 사람이니 가까이할 것 없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걸림돌이 된다.

오로지 독서하고, 아나파나 사티를 하고, 두뇌영양제를 꼭 챙겨먹고, 아포페니아를 해라.

아포페니아는 아빠가 책을 써 둘 테니 꼭 지니고 읽어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 아빠 책상 앞에 USB를 담은 봉투를 항상 놓는다. 봉투에 네 이름이 적혀 있다.


내가 적지 않은 일인데 어떡할지 당황스럽고, 아빠 의견이 궁금한 때가 있거든 공기 맑은 나무 아래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나파나를 해라. 그러면 아마 답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아빠는 늘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