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절에서 실컷 놀다 왔다.
내 인생에서 붓다가 없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보면 아득한 생각마저 든다.
내가 붓다를 만난 건 공주고등학교 1학년 때 갑사포교당이 처음이다. 그 전에도 어머니 따라 절에 간 적은 있지만 뭔지도 모르는 전통문화로 만났을 뿐이고, 이때 처음 불교 기초 교리를 배웠다.
그러고도 포교당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스님의 절로 자주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이 스님은 포교당을 그만 둔 뒤로 내가 사는 이모네 뒷산 기슭의 자그마한 암자에 머무셨는데, 나는 저녁만 먹으면 뛰어올라가 스님의 가르침을 청하곤 했다.
대학 다닐 때는 입학하자마자 대학생불교연합회에 들어가고,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고향집으로 가는 대신 양주 봉선사로 찾아가 보름간 산사 생활을 하겠노라고 청했다. 그때 운 좋게도 운허 스님 시봉을 몇 번 들고, 주지 월운 스님이 경전을 번역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학승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알게 된 계기이자 이래서 붓다가 되겠나 의구심이 처음으로 생기기도 했다.
3학년 때는 대학생불교연합회 서울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내게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다. 마침 조계사파와 개운사파가 극한 대립하는 중에 우리는 개운사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는데, 주로 월주 스님 지도를 받았다. 이 분께서는 나중에 단독 총무원장이 되시지만 이때만 해도 그 갈등이 자주 일어나고, 불교에 대한 염증이 널리 퍼질 때였다. 그러다보니 공부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눈에 스님들이란 존재는 하찮은 이익집단으로 보였다. 이런 이미지가 지금도 머릿속에서 다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나마도 5.18광주항쟁이 일어나 캠퍼스가 군대에 점령되는 바람에 중도에 활동을 접었지만, 휴교령이 내려진 그 시각에도 나는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경서원, 초간>란 스님들의 깨달음 이야기를 쓰고, 처녀작 <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를 썼다. 이 시기에 나는 광덕 스님을 만나 불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열심히 불서를 읽어냈다.
군에 가서는 교회, 성당은 있는데 법당이 없어 갖은 궁리 끝에 법당을 지었다. 당시 계급이 상병이었는데, 군대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상병에 불과한 사병이 부대 내에 법당을 세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장교들에게 살살거려 법당 공간을 얻어내고, 인제 3군단 군법사(너무 오래되어 이름을 잊었다)를 찾아가 법당을 세우겠다는 포부를 말씀드리고 요령을 알려 달라하여 내가 광명의 어떤 절(그 고마운 절 이름을 잊었다)에 가서 불상 등 불구를 얻고, 조계사 누군가에게 찾아가 나머지 지원을 받았다. 군법사께서는 인제 지역 불자들에게 나의 이런 뜻을 전하고 그분들의 보시를 구해내셨다.
이렇게 하여 내 생애 처음으로 법당을 세우고, 군법사께서 인제 지역 스님과 불자들을 초청하여 대대적인 법당 낙성식과 점안식을 해주셨다. 그해 처음 맞은 부처님 오신 날에 장병 50여 명이 연등에 불을 밝혀 우리 부대 마을을 행진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이후 한동안 나는 불교를 떠나 있었다. 불교방송을 틀어봐도 옹알이하는 듯해 금세 채널을 돌려버리고, 어쩌다 절에 가서 스님들 법문을 들어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흥미를 잃었다. 자주 다니던 절조차 끊어버리고, 뜻이 통하는 동갑내기 친구 스님 빼고는 다 무시하고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러다가 너무 허전하여 용인 반야선원과 보문정사에 나가 자광 스님의 코끼리 상아 같은 불심을 보고, 덕산 스님의 여러 가지 큰 경험을 통해 보시 공덕의 법칙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친구 스님인 자륜으로부터 배운 수식관(아나파나 사티)을 놓지 않았다. 수식관은, 2001년에 처음 친구 스님인 자륜으로부터 배웠는데, 이 수식관으로 나는 바이오코드 3급 수준을 2급으로 끌어올리고, 이후 1급을 개척해냈다.
그런 중에 2016년부터 더 집중하여 2017년 초에는 아나파나 사티가 얼마나 중요한 수행인지 더 절실히 깨닫고, 이른바 몰입에 들어갔다. 그래서 바이오코드 1급을 2급으로 내려보내고 새로운 1급 수준을 마련했다. 이에 대해서는 바이오코드연구소에 자세히 밝혀놓았다.
그런 중에 미얀마의 삐냐저따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삐냐저따 스님으로부터 '아나파나를 하지 않으면 붓다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없고, 붓다의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스스로 붓다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붓다가 되려면 아나파나 사티를 맹렬하게 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부터 나는 매일매일 아나파나 사티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덕산 스님께서 나를 미얀마 마하미얀 정글 사원으로 데려가 주셔서 거기서 아나파나 사티에 집중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나를 완성할 수 있는 깨달음의 그릇을 얻었다.
그뒤로 토요일이면 아나파나 사티를 하는 모임을 이끌어오고 있는데, 이런 이치로 부처님 오신 날을 생각하면 부모형제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건 사실 그리 큰 사건이 아니다. 내가 태어난 것이나 내 딸이 태어난 것이나 내 친구들이 태어난 것이나 다 그와 같이 거룩한 것이지, 특별히 부처의 탄생은 거룩하고 중생의 탄생은 거룩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붓다라는 그 종자야말로 위대하고, 수천 생 동안 쌓인 선업이 있어 깨달음의 길로 직행할 수 있는 인연을 스스로 만든 것이 다를 뿐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이 젊은이는 태자의 신분을 버렸다. 말이 그렇지 인간은 알량한 지위만 얻어도 그 지위를 이용해 남에게 자랑질하고, 거기 안주해 편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런 모든 것을 버렸다. 싫어서 버린 것이 아니다. 좋아서 버렸다.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버렸다.
그러고도 그는 6년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가르침을 일일이 맛보고 분별했다. 6년의 고통을 비유할 때 나는 내가 군대를 3번 다녀온 셈과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붓다의 고행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고도 그는 깡마른 몸으로 지쳐 죽을 지경에 이르러 핍팔라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거기서 궁즉통(窮卽通)의 이치를 깨우친 것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싯다르타의 두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부처님 오신 날이 그리 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싯다르타가 만일 자신에게 주어진 그럴 듯한 모든 조건을 다 버리지 않았다면, 그러고서 목숨 걸고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고 그런 철학자 한 명으로서 생을 마쳤으리라고 생각한다.
부처가 이 세상에 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버릴 수 없는 것까지 다 버린 다음에 빈 껍질만 남겨, 목숨 한 줄기만 붙들고 있다가 그 숨마저 마지막 수행에 바쳤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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