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오후 3시, 비가 내리는 운학동 길을 자동차로 달리던 중에 여든 살은 돼 보이는 한 할머니와 마주쳤다. 빈 깡통을 주워담은 보따리를 여러 개 쌓아 올린 손수레를 끌고 길을 건너려다 마침 내 차가 다가오는 걸 보고 잠시 멈춰 선 것이다. 나와 내 차가 할머니에게는 위협이 된 모양이다. 내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는 것 말고는 할머니의 표정에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시선은 오직 내 차에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할머니의 얼굴과 표정, 심지어 홍채까지 다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수레를 지나친 뒤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할머니는 수레를 끌며 천천히 길을 건넌다. 어떤 생명이든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살아남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없으면 폐지를 줍고, 빈 병, 빈 깡통을 모아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남 속이지 않고, 남의 것 훔치지 않고, 남의 종질을 하지 않으며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2. 50년 전, 당숙모가 낳은 계집아이가 있었다. 눈이 잘 안보이고, 귀가 잘 안들리는 장애아였다. 다섯 살이 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늘 이 아이를 찾아가 놀아주었다. "영미야, 오빠 왔다." 그러면 방긋 웃었다. 지금도 그 얼굴 그 표정이 선하다. 고등학교 문제로 유학을 떠나면서 이 동생을 더 보지 못했는데 내가 떠난 지 몇 달만에 죽었다. 당시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충분한 식이요법을 해줄 수도 없었다. 헬렌 켈러에게는 부자 부모가 있고, 훌륭한 설리번 선생이 계셨지만 우리 영미에게는 늙고 가난한 부모(당숙모는 아마 50에 가까웠을 듯) 밖에 없었다. 6촌오빠인 나 역시 가난하고 어려 뭘 어째야 되는지 알지 못하는 중학생이었다. 지금 같으면 어떡하든 살려내고, 말도 가르치련만 영미는 웃기만 하다가 죽었다. - 살아있는 생명이면 어떤 것이건 하나도 빠짐없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가늘거나 두텁거나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태어난 것이든 태어날 것이든, 이 세상 모든 존재여, 평화롭고 행복하라! * 미국 LA의 한인타운 지하철역에서 노숙자로 살아가는 52세의 Emily Zamourka. 24세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 푼돈을 벌어 살았지만 강도에게 그 목숨 같은 바이올린마저 빼앗긴 뒤 집세를 내지 못해 노숙자가 되었다. 그는 낮에는 노래하여 구걸을 하고, 밤에는 지하철역에 골판지를 깔고 잔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살기 위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기꾼이나 도둑이나 창녀가 되었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다. G02의 위대한 힘이다. 순찰 중이던 LAPD가 우연히 이 장면을 보고 촬영하여 SNS에 올렸다. 에밀리, 평화롭고 행복하라. 어제 만난 할머니, 평화롭고 행복하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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