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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정청래 망언 해설 2

정청래 망언 해설 2
정청래란 이름이 맨 꼭대기에 검불처럼 동동 떠있어 그렇지 '원조 정청래'는 수없이 많다.
1200년 역사를 지닌 해인사, 그리고 웬만하면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구본사급 사찰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안다면 저런 망언을 할 수가 없다.
1. 해방되자마자 쳐들어온 미군은, 조선을 일본쯤으로 보고 자신들을 점령군이라고 자처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 이승만을 앞세우고,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인들을 모아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이들을 앞잡이로 하여 좌우 대결 선봉에 서도록 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인 관료, 일본군 등이 허겁지겁 달아나면서 놓고간 집과 부동산, 기업, 기계, 자동차, 산업 등을 모조리 압수, 이것을 대부분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나눠줬다. 이때 기독교 대학, 기독교 학교, 기독교 방송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적산가옥 등은 교회로 탈바꿈했다.
기독교서북청년단은 좀 유식하면 군대 장교로 보내고, 경찰 간부로 보내고, 좀 무식하면 경찰 앞잡이로 써 제주 4.3사태 현장에 보내 부녀자를 겁탈하고 민간인을 약탈하도록 했다.
2. 기독교인 이승만 대통령은 불교를 탄압하기 위해 대처승 논란을 일부러 일으켜 정화 명목으로 사판승 대부분을 몰아냈다. 기독교는 죄다 마누라 자식 거느린 목사들이 이끌건만 불교 사판승은 왜 결혼하면 안된다는 건지, 그걸 왜 기독교인이 정해 싸움을 붙였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제 때 친일하기로는 목사들이 더 열심이었는데, 목사 신부 모두 일제 신사 앞에 몰려가 예배했는데, 불교가 대신 탄압을 받았다.
3. 육이오전쟁이 나고 구호물자가 들어올 때에도 기독교인 이승만 정권은 교회를 통해 밀가루, 빵, 헌옷, 과자, 쌀 등을 나눠주었다. 교회는 미국물자로 넘쳐나고 불교신자나 승려들은 빵이라도 얻으려면 교회에 가서 줄을 서야 했다.
4. 기독교인 이승만은 1949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지만 부처님오신날은 1975년이 돼서야 가까스로 공유일이 된다. 아시아에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인 나라는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밖에 없다. 똑같이 일본 군정을 한 일본에서도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 아니다. 미군이 강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기독교인 이승만 덕분이다.
군대나 경찰에 있는 군목 역시 1950년 개신교와 가톨릭만 실시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종교이던 불교는 일부러 막았다. 불교는 전사자가 많이 나오는 월남전 파병 시절인 1968년, 즉 18년 뒤에야 군승이 파견되었다. 국교가 기독교도 아니건만 대대마다 교회와 천주교 성당은 있어도 법당은 없었다. 1990년대 이후에 군법당이 생기기 시작했다.
5. 독재자 전두환은 민주화운동하다 도망친 사람들을 잡는다고 무슨 군사작전하듯이 전국의 사찰에 일제히 군대를 보내 군홧발로 법당을 더럽히고 승려들을 극악무도한 죄인 다루듯 걷어차고 침뱉었다. 그러고는 항의하고 따지는 승려들을 붙잡아 삼청교육대로 보내 버렸다. 민주화 세력들이 만든 당이라는 민주당에서 이런 아픔을 가진 불교계를 모욕할 줄은 몰랐다.
6. 조선 말기 천주교가 몰래 들어올 때 불교 승려들은 천주교인들을 절에 숨겨주고, 천주교인들이 마음껏 성경공부를 하도록 방을 내주고 밥을 주고 잠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던 천진암과 주어사, 오늘날에는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가 다 차지하여 불교인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천주교인들을 몰래 숨겨주었다가 처형당하거나 몰락한 불교 승려들은 이렇게 모욕당하고 있다.
7.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가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발버둥치던 중 묘향산 휴정 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국난극복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몇 달 전, 휴정 스님은 선조에게 잡혀가 국청을 당하면서 고문과 모욕을 당헸건만, 그래도 전국의 승려들에게 궐기하라는 격문을 날려 마침내 승군이 일어났다. 승군은 평양성 수복에 앞장서고,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금산사 출신 등 전라도 승군 2500명이 권율군 2500명과 함께 싸웠지만, 오늘날 기록에서 처영의 승군은 보이지 않고 권율만 보인다. 또 금산에서 일본군과 전원 전사하도록 싸운 중봉 조헌의 700명과 영규 스님의 승병 800명이 있지만, 오늘날 유림과 기독교인들은 이 역사를 지우고 오로지 700의총만 기려 승병 800명의 희생은 숨겨버렸다. 조헌과 영규는 이에 앞서 일본군에 함락된 청주성 수복에도 성공하지만 유림과 기독교인들은 이마저도 지워버렸다.
이순신 제독 아래에도 전라도 여수 흥국사 등 수승군 수천 명이 참전하여 목숨을 잃었지만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다.
진주대첩에 승군을 이끌고 참전한 해인사의 신열 스님과 승군들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포로를 요구하러 사신을 보낼 때 대신들 누구도 무서워 나서지 않자 비겁한 선조는 또 8도도총섭으로 승군을 이끈 사명당 유정을 보냈다. 포로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온 유정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자 유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소리지르는 바람에 며칠만에 그만두는 일도 생겼다.
이러고도 승군들은 전란에 대비, 전국에 산성을 쌓아 주둔했다. 남한산성도 그런 성 중 하나다. 하지만 행주산성 영화를 보든 소설을 보든 거기 주둔하던 승군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전국의 산성이 대부분 승군이 쌓고 승군이 주둔하던 곳이지만 유림들은 이런 역사를 다 지워버렸다.
8. 몽골군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고려 승려들은 붓다의 힘으로 마귀들을 누른다는 항마군을 조직해 싸우고, 한편으로 팔만대장경을 조각하고 인쇄하여 몽골군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노력했다.
용인 처인성의 승장 김윤후는 화살 한 대로 몽골군사령관 살리타이의 목을 꿰뚫어 즉사시켰지만, 오늘날 쥐꼬리만한 공적만 있어도 커다란 동상을 세우는 이 나라에서 김윤후는 동상조차 없다. 현지 용인시에서도 김윤후의 동상은커녕 영정조차 없다. 기독교인들이 반대해서 아무것도 안된다.
이밖에도 불교의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 나는 1989년 <당취>란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연재소설을 쓴 바 있다. 승군들의 참전기다. 그 전쟁에서 죽은 승군 누구도 나라로부터 훈장이나 포상을 받은 바 없다. 대신 철저히 지워지고 잊혀졌을 뿐이다. 도리어 유림들은 전쟁 이후 사찰에 쳐들어가 아름다운 나무를 훔쳐가고, 누각을 뜯어다 제 집 정원에 세워 기생파티를 하고, 반반한 비구니라도 있으면 잡아다가 첩으로 삼았다. 지방 관원들은 툭하면 승려들을 불러 부역을 시켰다.
정청래의 주둥이에는 이런 불교계의 오랜 한이 귀신들처럼 서려 있다.
정청래는 한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1200년 질곡의 역사에도 꿋꿋이 지켜온 우리 문화재에 대한 단 한 점의 경외심 없이 문화재관람료를 봉이 김선달이 팔아먹은 대동강 물처럼 흔해빠진 것으로 모욕했다.
해인사는 대웅전과 몇 개 전각만인 줄 안다. 교회처럼 세들어 사는 방 한 칸인 줄 안다. 아니다. 무려 3천만 평이다. 가야산을 등산하려면 해인사 땅을 밟지 않을 수 없고, 해인사 승려들의 발자취와 그들이 가꾼 초목을 피해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좀 안다는 것들도 해인사를 그저 사찰 하나로 안다. 해인사란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가야산 여기저기 저런 말사와 부속 암자가 깃들어 있다. 교회만 보고 자란 정청래는 이런 개념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까짓 3천원? 그럼 왜 1200년간 국가는 그 돈을 주지 않고 승려들더러 알아서 하라고 방치했는가? 팔만대장경 하나만 관리하려고 해도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기독교인들이 수시로 쳐들어와 불지르려 성냥불 켜대고, 발 구르며 땅밟기하는 건 누가 막고 지키나? CCTV 놓고 경비 세워도 광신 기독교인들은 용케 장경각까지 기어들어가 침뱉고 땅밟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알면서 정청래가 제 혓바닥이라고 멋대로 놀린 것이다.
그래, 그까짓 3천원, 국보이고 보물이고 문화재라면 마땅히 국가가 내라. 정청래는 힘있는 국회의원이니 국가가 대신 문화재관람료를 내주면 된다. 그런 노력은 안하고 비아냥거리고 모욕하는 건 죽어서 기어이 지옥가겠다는 결심 아니고 무엇이랴. 못난 것.
* 불교탄압 사례 모음. 기독교인 이명박이 빠지고, 천주교인 문재인도 빠졌다.
* 오른쪽, 신진환 작품 <한마음>. 오늘 한마음이 되어 종교차별 분쇄하자. 차별금지법조차 거부하는 집권 문재인 세력은 천벌받아야 한다. 이 자들의 위선이 징그럽다.

신진환 작품 <한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