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원 시절에 배운 연암 박지원의 글이다. 나는 그간 이 글 '소단적치인'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애를 써왔다.
요즘도 연암이 비판하는 문체를 고집하는 문사들이 많길래 굳이 내 입을 빌 것도 없이 이 글을 보이고자 한다.
<소단적치인(騷檀赤幟引)>
소위 고문파들이 쓴 서(序)나 기(記)를 보면 중국 문사들의 말로 절반을 채운다. 그 허위(虛僞) 부람(浮濫)한 문장은 도저히 역겨워 읽을 수가 없다. 특히 그들은, 입말은 일체 쓰지 않고 점잖은 문어, 특히 경전에나 나오는 고상한 문어만 골라 쓰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속담이니 속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천지와 일월이 비록 억만 년 전부터 창조된 것이라도, 그 생생일신(生生日新)이 쉴 사이가 없다. 오늘 뜨는 해가 비록 어제도 떴고, 수년 전에도 떴고, 심지어 수만 년 전에도 떴던 바로 그 해이지만 여전히 새롭다. 일출을 놓고 낡았다고 하거나 구태의연하다고 하는 이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떤 날은 구름이 끼고, 어떤 날은 안개가 끼지만 해는 그러한 시속에 어울려 새롭게 오르기 때문에 날로 달라지는 것이다. 해가 만일, 아니다, 어제는 파도가 일지도 않았고 구름도 끼지 않았다 하여 파도를 잠재우고 구름을 걷어낸다면 그야말로 일출은 낡아빠지고 구태의연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옛날부터 시도 많고 책도 많지만 그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문장은 물이 흐르듯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이며, 변해야 마땅한 것이다.
문장은 사실(寫實)에 그쳐야 한다. 망상이나 가식은 금물이며 고어와 경지(經旨;경전에서 따온 말)를 억지로 끌어다가 근엄을 위장하는 것도 못쓴다.
문장의 조직은 용병(用兵)과 같다. 문장에는 열네 개의 조직이 있다. 그것은 자(字), 의(意), 제목, 장고(掌故), 구와 장(句章), 운과 조(韻調), 조응(照應), 비유, 억양 반복, 파제 결속(破題結束), 함축, 여음(餘音)이다.
□자(字)/병사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는 병사와 같다. 병사는 독립된 장정 한 사람이다. 병사는 또한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되는 군대의 일원이다. 이와같이 글자나 단어가 스스로 행동할 수는 없다.
병사들이 모여서 소대, 중대, 대대를 이루듯이 글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문장을 이룬다.
문장은 단어를 무질서하게 배열하는 것이 아니다. 병사들과 같이 일정한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의(意)/장수
단어를 배열하는 이치, 이것이 바로 의(意)다. 의란 병사들에게 내리는 명령이요, 작전이며 전술 전략이다. 그러므로 자가 병사라면 의는 장수이다. 의는 병사를 통제하고 조화하는 장수인 것이다.
장수는 엄격하고 치밀하게 지휘해야 한다. 문장을 쓰는 사람의 생각도 그와 다를 수는 없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앞뒤가 맞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조화가 되지 않으면 글로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글은 문장의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일관된 생각으로 정리한 논리의 요체인 것이다. 그래야만 맥락이 잡히고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제목/적
제목은 적이다. 글 쓰는 이는 적을 공격하듯이 목표를 향하여 군대를 돌진시킨다. 적을 공략하려면 전술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식을 동원하고, 제목을 가장 알맞게 공략할 수 있는 주제를 설정한다. 물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을 택해야 한다. 주제를 잡은 후에는 글 전체가 주제로 집중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그래야 적으로서의 제목을 능히 공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신념으로 항상 주제를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장고(掌故)/지형지물과 특수 무기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소재를 말함이다.
전쟁터에도 나무, 바위, 언덕, 꽃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면 적을 공격하기가 유리하다. 무기고에서 특별한 무기를 잡아 공격하면 적을 공격하기가 더 쉽다. 세밀한 지형 답사와 적의 동태를 파악하여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한다. 병력의 포진, 안배, 진퇴에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형지물도 이용하지 못하고, 특수 무기도 없이 칼만 든 병사를 부린다면 싸움이 지리멸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읽는 이는 마치 물이 떨어지고 양식이 모자라 지친 백성처럼 글 읽는데 흥미를 잃고 만다. 그러나 지형지물과 특수 무기를 잘 배치하면 문장에 색채가 오르고, 윤기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구와 장(句章)/대오(隊伍)
자(字)를 묶으면 구(句)가 되고, 구를 묶으면 장(章)이 된다.
병사들이 대오를 지어 행진하는 것이다. 단어나 문장 자체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구성상의 변화가 다양해야 한다. 대오가 진행하는 것은 이미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혼란과 탈선이 있으면 싸움에서 지게 된다.
전투가 시작되면 대오는 때로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어느 한쪽을 강화하기도 하고 어느 부대는 병력을 줄이기도 할 것이다. 문장의 강조, 생략, 반복, 대구가 전투에서 벌어지듯이 짜임새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운과 조(韻調)/금고(金鼓)와 정기(旌旗)
북 치고 깃발을 날리는 것이다. 군대의 울긋불긋한 깃발과 북소리, 징소리는 군대의 위세와 사기를 돋구는 것이다. 사기는 전투의 성패를 좌우한다.
운은 그냥 보통의 소리가 아니다. 운율이 있는 소리다. 우리말이 생긴 옛날부터 말에는 운율이 있어 왔다. 운율의 농박(濃薄)으로 율문과 산문으로 나뉜다. 율문을 쓸 때가 있고 산문을 쓸 때가 있으니 그것은 장수가 필요할 때마다 쓰는 것이다.
조는 가락이다. 운이 모이면 가락을 이룬다. 문장에 가락이 붙으면 군사들의 사기가 치솟듯이 글에도 힘이 붙는다.
문장에는 이처럼 운율이 있듯 성색정경(聲色情境)이 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옛사람의 음성을 글 속에서 들을 수 있다. 문장에는 빛깔도 있다. 그리고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맑은 물이 흐르고, 산이 푸르른 것을 표현함이 곧 문장의 정(情)이다. 그리고 먼 바다에는 물결이 보이지 않고, 먼 산에는 나무가 뚜렷하지 않는 감추어진 멋이 경(境)이다. 이러한 성색정경으로서 문장은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조응(照應)/횃불
문장을 더 선명하고 인상적으로 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을 강력하게 표현함을 일컫는다. 마치 횃불을 치켜들어 어느 한 부분을 훤히 밝히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주제를 선명하게 하고, 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비유/유기(遊騎)
해학과 풍자처럼 뜬금없이 나타나 한 바탕 소란을 일으켜 주제를 깜짝 놀라게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전쟁터에서 유격대처럼 적진을 뚫고 들어가 종횡무진 적을 교란시키는 것과 같다.
□억양 반복/塵戰손수+斯殺
문장을 한결 발랄하고 절실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억양을 주고 반복을 한다. 성이 무너지지 않으면 반복하여 공격하듯 주제가 무거울 때에는 서너 차례 공격하는 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싸움이 고조되어 직접 전투를 하고 죽이고 잡는 결전에 이른 것이다.
□파제 결속(破題結束)/擒敵
적을 잡아야 전쟁이 끝난다. 그리고 그 적장을 잡아야 적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전쟁에서 승리를 확정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편이 끝난 다음에 적장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별동대
사기로 뭉친 군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공격 효과를 높이는 것이다. 함축된 문장, 함축된 글이 있어야 주제를 밝히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려면 잘 훈련되고 좋은 무기를 휴대한 부대가 선두에서 공격을 하듯이, 글에서도 이렇게 응집되고 함축된 문장이 필요한 것이다.
□여음(餘音)/개선(凱旋)
글이 끝났는데도 남아 있는 흥분 같은 것이다. 여운이 길게 남는 글이어야 하는 것은 마치 대승을 거둔 전투일수록 개선의 나팔소리가 드높아 널리 울려퍼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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