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이야기 | 2007/05/19 (토) 22:18
전원생활을 꿈꾸신다구요?
일단 스톱!나는 올해로 햇수로 11년째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생활하고 있다. 흔히들 나같이 사는 것을 전원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날 잘 아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용인 땅을 소개해달라고도 한다. 실제로 여성지나 주택 전문지 같은 데를 보면 내가 사는 용인을 가리켜 살기 좋은 전원도시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 말 잘 듣고 생각한 뒤에 각오가 되거든 그때 다시 말하라고 권한다.
정말이지 살다 보니 공기 하난 정말 좋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모두 불편할 따름이다. 여름에는 모기가 얼마나 많은지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다. 옆집에서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이라도 기르면 아무리 방역을 해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경운기가 오갈 때마다 축분(畜糞)을 흘리고 다니기 일쑤고, 한번 흘린 것은 비가 와서 저절로 떠내려가지 않으면 아무도 치우지 않는다. 기껏 돈들여 집을 짓고나니 집앞에 축사(畜舍)가 들어설 때의 그 황당함을 누가 알까.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아침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시골 생활은 고역이다. 요즘같은 여름이면 새벽 다섯 시부터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게 오가고, 이장이 불쑥 찾아와서 무슨 도장을 찍어달라고 초인종을 누른다.
시골이라고 더 좋은 농산물을 사먹지도 못한다. 도매꾼들한테는 헐값에 넘겨도 이웃한테는 그것을 벌충하기라도 하려는 듯 시장 가격 뺨치게 부르고, 쌀이며 마늘 따위를 골고루 팔아주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다툼이 일어나 괜한 구설에 오른다. 그나마도 농약을 치지 않은 걸로 사먹고 싶지만 판매용 농산물에는 숫제 농약을 갖다 들이붓는다.
또 말은 얼마나 많은지 그 많은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시골에서는 살 수가 없다. 전통적인 농민들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다. 심을 때 반짝, 거둘 때 반짝 고생할 뿐 일년에 기나긴 농한기가 두 번이나 찾아온다. 겨울이야 전통적인 농한기라고 하지만, 요즘에는 여름도 농한기다.
농사 기술이 발전되면서 예전처럼 김을 매는 일도 없어지고, 북 주는 일도 없다. 무엇이든 심고 나서 비료 한번, 농약 몇 번 쳐주면 작물은 저절로 자란다. 내 어린 시절, 그러니까 60년대나 70년대에는 여름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요즘 농촌에서는 아무도 여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름이 농한기로 바뀐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러다 보니 여름이면 마을잔치가 열리고, 온천이다 뭐다(주로 장사꾼들이 어리숙한 시골 사람들에게 비싼 물건을 팔려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여행이 참 많다.) 해서 동네가 텅 비기 일쑤다. 빈 동네를 나 혼자 지키다시피 한 적도 많다. 그러지 않으면 마을회관(대부분 정부에서 수천 만원씩 지원받아 짓는데 노래방 기계나 비싼 운동기구 따위를 갖다 놓는다.)에 모여 고스톱을 치거나 대낮부터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한다. 남는 시간에는 사람들 씹는 재미에 희희낙락한다.
시골 마을을 다니다 보면 5톤 이상 트럭 진입 금지니 하는 플래카드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동네에도 거의 6개월째 그게 붙어 있다. 동네에 누군가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하는데 수천만 원을 내놓았다는데도 아무도 만족하질 않는다. 집 한 채에 얼마꼴로 남겨먹는다면서 겨우 기천이냐, 그러면서 트럭이 드나드는 동네길에 경운기를 갖다 가로막는다.
내가 임시로 살고 있는 이 집도 처음 집을 지을 때 앞집 사람이 트럭 앞에 드러누워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몇백만 원을 뜯겼다. 이런 마당에는 경찰도 아무 의미가 없다. 개발붐이 일면서 돈맛을 알기 시작한 시골 사람들은 경찰을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농민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뉴스에서 더러 보았을 것이다. 배추값이 떨어지면 트랙터로 갈아엎고, 송아지값이 떨어지면 광화문 네거리에 갖다 버리고, 쌀값이 떨어지면 벼가 익은 논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다.(내가 책 안팔린다고 길거리에 내다버리면 뭐라고들 할까 궁금할 때가 있다.) 물론 거기도 일부지만, 그 일부가 항상 강경 분위기를 주도하니 나머지 잠잠하신 농민들은 있으나마나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값이 맞으면 짓고, 아니면 갈아엎는 것이 요즘 농업의 원리다. 배추를 자식처럼 길렀다면, 송아지를 애지중지 길렀다면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그 농산물 때문에 먹고 입고 즐기면서 수지가 안맞으면 대번에 폭군처럼 돌변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순박한 얼굴이 아니라 잔인무도한 정글의 맹수들 같다.
- 1999년. 제발 이 글은 농민들이 안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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